새벽 어스름 사이로 보이는
[영7]네가 가장 본문
“카지 못 봤어 종한구?”
한 해의 마지막 날 오후, 만장정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잤던 종한구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푸른빛 사이드 포니테일에 반창고가 인상 깊은 소녀, 그들의 지휘사인 레체였다.
“이거야 별일이군요? 둘이서 같이 있지 않다니, 혹시 싸웠습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단호히 말하면서도 레체의 눈동자는 쉼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에 그의 감이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라 신호를 보냈고, 종한구는 할 일도 없는 겸 그 분위기에 올라탔다.
“그렇지 않다면 왜 두 분이 함께이지 않으신 건가요?”
“그거야.....”
“왜 카지가 소원 성취 부적을 구매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을까요?”
“그건.......아니 역시 카지를 봤잖아!”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하며 종한구를 닦달하자 그는 특유의 웃음으로 유연하게 넘어갔다. 만장정의 쌍둥이 인형이 봤다면 종한구에게 바랄 걸 바라야지 지휘사 라며 혀를 찼을 상황이었다. 그는 레체의 손길을 이리저리 피해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의자 두 개를 꺼내와 한 의자를 그의 앞에 내려놓고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자, 아무런 상황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카지를 만나면 다시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라고요? 이럴 때는 이 늙은이에게 고민을 털어보는 건 어떨까요?”
“할아버지 얼굴도 아니면서”
“중요한 건 세월을 많이 겪어 현명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죠”
말이라도 못한다면 볼을 꼬집어 줄텐데 장사치 다운 청산유수에 레체는 결국 항복했다. 사실 그녀로서도 왜 카지가 가버렸는지 의문을 해소할 상대가 필요하긴 했기에 곧장 상황을 설명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들의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였다. 카지는 겨울에 일찍 피어난 벚꽃같이 아름다웠고 아침으로 함께 먹은 샌드위치도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사이에 이상이 발생한 건 아침 순찰을 시작할 무렵부터였다.
“저기 있잖아 레체, 사실 내가.......”
“아이고 사람 살려!”
카지의 말을 끊고 날아든 비명 소리에 레체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아직 복구가 덜 된 계단을 지나가던 할머니의 발이 빠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빠르게 할머니에게 다가간 레체가 그녀를 안심시키고는 조심스레 발을 계단 틈에서 빼내었다.
“아이고, 내 다리”
“다리가 많이 아프신가요? 일단 가까운 병원으로 모실게요. 카지~!”
다친 다리를 발견한 레체가 서둘러 그녀를 업고 카지를 부르자 그녀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퍼뜩 놀라며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내가 할머니를 업을게 레체”
“아니야 벌써 내가 업었는걸? 카지는 할머니 짐이 빠지지 않도록 들어줘”
그리고 카지의 말을 더 들을 새도 없이 빠르게 병원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부상은 다행히 크지 않았고, 그쪽으로 온 보호자에게 인계한 레체는 카지와 함께 다시 순찰을 시작했다.
“할머니가 많이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이야. 안화한테 그쪽 지역 복구를 서둘러 달라고 말해야겠어”
“응,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말이야 레체”
“흑문이다!”
“누가 중앙청에 연락해!”
또다시 카지의 말을 끊으며 이번에 등장한 것은 흑문이었다. 안개를 머금고 크기를 부풀려가는 흑문의 모습에 카지는 말없이 자신의 신기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흑문, 잔여 몬스터, 소매치기, 무너진 건물 벽 등등이 연이어 나타났고 레체는 지휘사로서 피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둘씩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파트너의 안색이 점점 창백하게 물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점심 무렵이 되자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오전 내내 동분서주한 탓에 배꼽 시계가 점심시간을 알리고 나서야 레체는 카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카지 벌써 점심시간이네, 뭐 먹을까?”
“........레체는”
“응?”
“레체는 바보야!!”
상처받은 얼굴로 울먹이던 카지가 그대로 레체를 등지고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푸하하하하하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한구가 폭소를 터뜨렸다. 어떻게 보면 놀리는 것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귀엽다는 것 같기도 한 웃음에 레체는 일단 종한구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어대던 종한구가 드디어 웃음을 멈추고 병 괴물이 준비한 찻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이제 다 웃은 거야?”
“네, 덕분에 한 달치 웃음을 다 쏟아내 봤네요”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생리적 눈물을 닦아내던 종한구가 한 잔을 레체에게 건넸다. 맑고 투명한 차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금 레체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래서 카지는 왜 그랬을까?”
“레체...... 의외로 둔했군요?”
“응?”
종한구의 동문서답에 레체가 눈을 깜빡이자 그가 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넘겼다. 언제나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광경을 보이던 두 사람이 이런 사소한 문제 때문에 다투다니 정말 그로서는 오래 살고 볼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더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이 이상 놀린다면 나중에 웬시에게 잔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싶어서 레체에게 힌트를 던져 줬다.
“오늘이 며칠이죠 레체?”
“12월 31일, 새해 전날이지?”
“그 새해 전날에 시가지에서 매년 벌이는 일이 뭘까요?”
“그거야 불꽃........놀이!!”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레체가 만장정에 걸려 있던 달력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연말에 열리는 불꽃놀이는 한해의 작별을 위한 축제이기도 했지만, 연인들을 위한 행사로도 유명했다. 레체 자신도 또한 ‘카지와 함께 가야지’라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쳤던 게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바빠서는 핑계에 불과해”
“그럼요, 올바른 연인의 자세를 지녔군요. 레체”
“그런데 종한구는 카지가 불꽃놀이에 가고 싶어 했다는 걸 어떻게 안거야?”
“그거야 불꽃놀이의 숨겨진 명당 정보를 제가 카지에게 팔았으니까요~”
명당자리의 주인도 아닐 텐데 정보를 팔았다고 당당히 밝히는 종한구의 모습은 얄미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현재 그 정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레체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 정보 나에게도 알려줘 종한구!”
“꽤 비싼 정보랍니다? 어디 보자, 아얏”
셈을 하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종한구는 순간 등 뒤에서 날아온 공격에 아픔을 호소했다. 그런 종한구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며 공격한 장본인인 종야오가 지휘사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로 가는 약도야, 혹시 모르겠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왕벚나무가 있는 붉은 건물을 물어보면 알려줄 거야”
“고마워 종야오!”
그의 친절에 진심으로 감사한 레체는 종야오에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바람처럼 만장정 밖으로 튀어 나갔다.
황혼이 물드는 시간, 카지는 종한구를 통해 알아낸 장소에 서 있었다. 원래라면 레체와 함께 이곳에 올 예정이었지만 현재 그녀는 혼자 있었다.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이 도시에서 제일 바쁜 사람일 뿐이었다.
“결국 혼자 와버렸어.”
다른 때에도 불꽃놀이는 함께 볼 수 있지만, 이번 불꽃놀이는 특히 그녀와 함께 보고 싶었다. 지나가던 길에 광고지에서 봤던 ‘연인과 함께 보면 행복해진다’는 문구가 그녀를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레체에게 불꽃놀이를 함께 보자고 말하기를 고대했다. 그녀라면 분명 거절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있어 줄 거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지휘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도시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오늘따라 사건과 사고가 그들의 발치에 깔리고 싶다는 듯이 무수히 일어났다. 레체는 특히나 누군가를 돕는 데에 자신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불꽃놀이라는 글자는 카지의 입 안에서만 구를 수밖에 없었다.
“레체 지금도 바쁘려나?”
자신이 그렇게 나와버렸으니 그녀는 지금쯤 다른 신기사와 함께 순찰을 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이 가라앉아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는 상황에 다다랐다.
옥상 위에 차가운 바람이 그녀를 스쳤다. 평소라면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줄 상대가 없어서인지 작은 바람도 시리게 느껴졌다. 그에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자 자신의 움직임에 주머니에 간신히 걸려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여기 오기 전에 만장정에서 산 소원성취 부적이었다. 레체와 헤어진 끝에 다다른 곳이 어째서인지 만장정이었고, 또 어째서인지 그 부적이 눈에 띄어서 가지고 있던 돈을 탈탈 털어서 샀다. 짙은 남색 바탕의 주머니에 하얀 실로 자수가 놓인 부적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색상이었다.
“레체.........”
자신을 향해 점심을 뭐 먹을지 물으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소원은 지극히 간단했다.
레체와 함께 있는 것.
불꽃놀이를 ‘레체’와 함께 보고 싶었던 것이지 불꽃놀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쉬움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것보다는 1분 1초라도 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혼자서 먼저 나와 버렸으니 레체가 화를 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사과하러 가야지”
그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그녀와 마주 보고 불꽃놀이에 초대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가 거절이라 하더라도 레체와 함께라면 불꽃놀이를 함께 보지 않더라도 행복해질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난 뒤, 레체가 있을 법한 곳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급하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이내 옥상의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카지!”
“레체?!”
숨을 빠르게 내쉬면서 다가온 레체가 이내 카지를 껴안았다. 달려온 사람 특유의 더운 열기가 그녀를 감싸 안으며 조금 전까지 추웠던 카지를 따뜻하게 덥혔다.
“내가, 헉, 뛰어오면서 생각했는데, 헉”
“일단 숨부터 쉬어 레체”
가볍게 등을 두드리자 레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뛰어오는 동안 카지를 생각했다. 불꽃놀이에 함께 가자고 말해줬으면 바로 수긍했을 텐데 그녀는 말 한마디 꺼내놓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하고 고민해본 결과 자신이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일에 눈을 돌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해 카지”
숨을 겨우 골라낸 레체가 카지를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계속 말하고 싶었을 텐데 제대로 들어주는 자세부터가 안 되어 있었다.
“항상 바빠서 미안해. 네가 옆에 있다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어. 그런데도 제대로 행동하지 못해서 미안해”
“레체......!”
포옹을 풀고 카지를 마주 바라보자 카지의 눈동자에 눈물 한 방울이 고여 있었다. 손을 내밀어 그 눈물방울을 거두며 레체는 맹세하듯 카지에게 말했다.
“나한테는 네가 가장 중요해 카지. 지금 당장 흑문이 열리고 사람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고 해도 그것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용서해줄래?’라며 레체가 양손을 모으자 카지가 활짝 웃으며 그 손을 감싸 안았다.
두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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